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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희망과 절망: 끝없는 탈출 대기
주인공 토미(핀 화이트헤드)는 가까스로 독일군의 포화를 뚫고 덩케르크 해변에 도착하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희망이 아닌 절망이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해변을 메운 수십만 명의 병사들, 모두가 탈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토미는 그곳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병사 깁슨(아뉴린 바나드)과 함께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여정을 시작합니다. 둘은 무너지는 병영 속에서 탈출할 기회를 끊임없이 엿보지만, 매번 실패와 죽음의 위기를 마주합니다.
한편, 병력을 철수시키기 위해 동원된 영국 해군은 군함만으로는 역부족이란 판단 하에 민간 선박에까지 징발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도슨(마크 라일런스)은 자신의 요트를 스스로 몰고 아들 피터(톰 글린-카니), 그리고 아들의 친구 조지(배리 케오건)와 함께 덩케르크로 향합니다. 전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그들은 PTSD에 시달리는 군인을 구조하지만, 배 안에서 벌어진 실랑이 끝에 조지가 머리를 다쳐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전쟁이 순수한 아이의 생명을 앗아가는 순간, 영화는 무거운 침묵으로 책임을 묻습니다.
한편, 독일 공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영국 전투기 조종사 파리어(톰 하디)는 하늘에서 철수 작전을 지원합니다. 적 기체를 하나둘 격추시키며 동료 병사들의 안전한 후퇴를 돕지만, 그는 곧 중대한 위기에 직면합니다. 연료 계기판이 고장 나며 귀환이 어려워진 것입니다. 동료들이 하나둘 전장에서 사라져 가는 가운데, 파리어는 남은 연료를 계산하며 마지막까지 하늘을 지킵니다. 연료가 다 떨어진 후에도 그는 글라이딩만으로 비행을 이어가고, 마침내 탈출 중인 병사들 위로 날아올라 그들에게 잠시나마 안도와 희망을 선사합니다.
이처럼 덩케르크는 세 갈래의 시선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생존 드라마를 그려냅니다. 각기 다른 인물들의 절박한 순간들이 교차하며 전쟁이 단순한 승패를 넘어, 누군가에겐 생존이고 또 누군가에겐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묵직하게 전달합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귀환과 연대
우여곡절 끝에 민간인 어선들이 드디어 덩케르크 해변에 도착합니다. 각자의 배에 가능한 한 많은 병사들을 태우려는 이들의 헌신은 구조 작업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군인들은 간신히 탈출해 고국 땅을 밟지만, 그들의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전장을 등지고 돌아온 자신들이 패잔병으로 낙인찍히지 않을까, 시민들의 냉담한 시선이 두렵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기다리고 있던 시민들은 병사들의 무사 귀환을 따뜻하게 맞이합니다. 그들을 실패자가 아닌, 살아 돌아온 영웅으로 환영합니다. 이 장면은 전쟁에서의 진정한 승리는 살아남는 것, 그리고 함께 돌아오는 것이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도슨과 피터는 조지의 이야기가 실린 신문 기사를 읽으며 묵묵히 그를 기립니다. 그는 큰 영웅은 아니었지만, 그날 그 바다 위에서 누구보다 용감했습니다. 하늘에서는 파리어가 고장 난 전투기에서 마지막까지 하늘을 지키다 결국 독일군에게 생포됩니다. 불타는 전투기를 뒤로한 그의 실루엣은, 끝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한 자의 고요한 자부심을 떠올리게 합니다.
영화는 다시 토미의 시선으로 돌아오며 끝을 맺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지만, 그 짧은 평온 속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의 온기를 느끼며 깊은 숨을 쉽니다. 덩케르크는 전쟁의 참혹함보다 그 속에서 피어난 인간의 용기와 연대,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침묵 속에서 울리는 진한 감동을 남깁니다.
감정 너머의 휴머니즘: 주인공 없는 전쟁 드라마
영화 덩케르크는 우리가 익숙하게 접해온 전쟁영화와는 사뭇 다른 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전쟁영화들이 한두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감정과 사연을 따라가며 관객의 공감을 유도하는 방식이라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의도적으로 이러한 방식을 배제합니다. 덩케르크에는 뚜렷한 주인공도, 깊이 있는 인물 설명도 없습니다. 그로 인해 어떤 관객에게는 다소 낯설고, 감정적으로 몰입하기 어려운 작품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점이 아니라, 놀란 감독의 뚜렷한 연출 의도에 기반한 선택입니다. 그는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단순한 전쟁 상황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묘사합니다. 개별 병사들의 이야기를 좇기보다는, 공포에 휩싸인 해변의 병사들, 그들을 구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오는 민간 선박들, 그리고 하늘에서 이들을 보호하려 애쓰는 전투기 조종사까지 수많은 익명의 이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집단의 생존 본능과 인간의 연대가 드러납니다.
덩케르크가 말하는 휴머니즘은 특정 인물의 감정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이 존재하는 이들이 서로를 위해 움직이는 그 집단의 움직임에서 비롯됩니다. 관객은 누구 하나에게 깊이 공감하기보다는,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스스로를 잊고 서로를 지켜내려 했던 인간들의 용기와 희생에 자연스레 감화됩니다.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선사하는 새로운 형태의 감동이며, 놀란이 덩케르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진정한 인간성의 초상입니다.